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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도 제4회 다문화가족 수기공모전 대상 작품

글쓴이 : 인클로버    작성일 : 15-10-2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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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다문화가족 수기공모전 대상 작품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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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유효연
 

대한민국 대표 계모 이야기로《신데렐라》《장화홍려》《콩쥐팥쥐》가 있다. 이 작품들이 다룬 이야기는 하나같이 악한 계모와 착한 딸 관련 내용으로 되어있다. 계모의 온갖 괴롭힘을 당하면서 꿋꿋하게 이겨내고 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는 나에게 두렵고 가슴 아린 이야기다.

1995년, 꿈이 많은 23세에 나는 날개만 달면 우주라도 날아가고 싶었다. 친구들처럼 취업하고,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아 평범한 인생을 살기에 너무 아깝기만 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밖 세상을 상상만 해도 무엇이든 될 것 같은 생각에 나는 한국산업연수를 선택했다. 개혁개방한지 얼마 되지 않은 중국 90년대 외국에 나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2년 간 한국어 공부를 했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어학 연수하면서 돈도 벌수 있어 일석이조를 거머쥘 수 있을 것 같아 부모와 친구들의 극구 반대에도 불구하고 꿈을 찾아 나서는 길은 신이 났기만 했다.

오는 배에서 보는 하늘은 유난히 높고 푸르기만 했다. 6개월 고된 노동하면서 월급은 고사하고 생활비도 주지 않은 사장 밑에 견디지 못해 도망을 나와 공장과 식당과 학원에 전전하면서 근근이 배고픔을 달랠 수 있었다. 당찬 선택의 설렘도 느끼기 전에 벌써 두려움과 고독함을 둘러싸여 이국타향에서 펄펄 떨었다. 동방예의지국의 친절과 배려는 어디로 갔는지 원통과 분노는 나를 더 깊은 구덩이에 빠뜨렸다. 파란만장 꿈을 안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나 나의 당찬 모습은 너무나 후회가 되다. 성공하지 않으면 다시 중국에 돌아가지 않은 다짐도 어디로 사라진지 의기소침했다. 망망대해에서 돛단배 한 척은 방향도 힘도 없이 폭풍과 폭우 속에 처참한 모습으로 뒹굴고 있었다. 직면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지 내 머리도 냉각을 되어 있었다. 나와의 약속을 깨고 돌아갈까 아니면 이대로 돌파할까 선택의 갈림길에 들어선 나는 더 이상 후퇴할 여유가 없을 때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 남자가 얼어버린 내 마음이 녹여주었다. 바로 지금 내 남편이다.

자상함과 따뜻함을 반해 1998년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과 동시에 부산에서 경남 하동이라는 작은 시골에 이사 와야만 했다. 꼬불꼬불 비포장 길을 달려서 도착한 하동은 황금들판과 풍성한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잠자리와 곡식들이 머리를 숙여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그 위태롭던 돛단배도 이제 안전한 항구에 정착할 것이라 고대하니 희망의 노래를 들려온 듯 했다. 한국행의 꿈도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아 몸이 에너지가 솟아올랐다.

부푼 꿈을 안고 도착한 남편의 고향 하동에는 편찮으신 부모님과 남편의 어린 두 딸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이야기를 듣지 못한 나는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편찮으신 80대 노부모님은 계시고, 위에 누님 여섯 분과 남편의 어린 두 딸도 있었다. 외아들인 남편은 부모님을 모셔야 할뿐만 아니라 두 딸까지 키워야 할 처지다. 순간에 내 꿈이 산산조각 부서진 소리를 들었다. 호랑이굴에서 빠져나와 늑대 굴에 들어간 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삶은 나에게 연습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엄마가 되데 했다. 나는 피할 수 없는 이런 현실을 죽도록 외면하고 싶었다. “난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고, 이 사실을 받아 들릴 자신이 없다. 나는 단지 남편을 사랑할 뿐 그의 사랑하는 모든 것을 포옹할 수 없다.” 절망 속에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도 없었다. 무의식 속에 밥、빨래、청소、아이들을 학교 보내는 것은 유일한 하루 일과였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남편은 일하러 나가면 만삭의 몸으로 지쳐있는 나를 편찮으신 시부모님과 아이들이 애처로운 눈으로 나만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딸을 낳았다. 출산의 고통을 이겨내고 돌아온 집에 전쟁터 방불케 했다. 미역국 대신 빨래 산더미가 나를 기다리다. 연세가 많은 시부모님은 내심 손자를 기다리다 실망의 눈물을 훔치고 냉랭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 핏덩이를 내다보며 대성통곡했다. 내가 선택한 인생은 실패 연속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되돌아가고 싶었다. 이것이 정말 내가 소망하고 간절히 바라는 인생인가 아이를 보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문득 80세를 넘은 시부모님의 눈에서 나의 그림자를 보았다. 나도 역시 병들고 늙어갈 것이다. 7남매 키우고, 엄마도 없는 어린 손녀를 돌보느라 자기 인생을 즐기지 못한 채 벌써 병들고 있었다. 그나마 새 며느리를 보면서 희망을 가졌던 그분들의 작은 희망조차 내가 밟아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두 딸이 새엄마가 생기니까 조심스럽게 다가와도 고슴도치처럼 가시만 돈치는 모습이 얼마나 상처를 받을까 생각하지는 못했다. 남편도 어떨까? 다시 사랑을 찾아 단란한 가정을 꾸려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거짓말까지 해서 나를 데리고 왔는데 힘들기만 했다. 더구나 일곱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부담감과 스트레스 인하여 술과 담배에 찌들려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나 혼자의 상처만 들여다보느라 다른 식구들을 챙길 여유가 없어던 나는 엄마가 된 후 주저않아 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 가정의 자화상이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나는 여태껏 나 자신만 사랑할 줄 아는 그런 사람었을까? 나만 변하면 되는데 왜 고집을 피워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기왕 선택한 길이니 힘께 가보자고 다짐했다.

나의 환경에 조금씩 익숙해 질 무렵에 둘째 딸을 낳았다. 연세 많은 시부모님은 거동도 불편하고 치매도 찾아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일상생활하기가 힘들었다. 식구가 점점 많아지고 경제적 수입은 남편뿐이라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남편은 무능한 자신을 잊기 위해 날마다 술로 살았다. 흐트러진 정신을 쓸어 담을 수 없이 우리 가정은 추락하고 있었다. 시부모님의 병원비와 딸들의 양육비가 나를 압박하고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전처의 두 딸을 엄마에게로 보낼까? 시부모님을 버리고 우리만 살까? 많은 고민을 했다. 어려서 엄마와 헤어져 사랑받아야 할 어린 나이에 새엄마 밑에 얼마나 사랑받고 싶었을까 지금 와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진다. 내 눈치 보면서 혹시 자신들을 또 버릴까 전전긍긍하며 엄마라고 부르는 어린 것들이 가여워서 보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병든 시부모님을 버릴 수도 없었다. 자식을 위해 인생의 대부분을 희생해며 효도도 한번 받지 못한 채 아파하고 있었다. 고민 고민하다가 내가 낳은 세살과 돌쟁이 어린 두 딸을 중국친정으로 보내기로 했다.

대학교도 졸업하고 한국어도 제법 하는 내가 작은 시골에서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살아야 하기에 나는 하우스일을 시작했다. 온 세상 끙끙 언 겨울의 이른 새벽에 나가서 상추작업을 해서 살림에 보탰고, 여름에 식당에서 돈을 벌었다. 할 줄 모르는 농사일도 이웃의 도움으로 하기 시작했다. 나는 살아야 한다. 나는 잘 살아야 한다. 나는 기필코 이 역경을 이기고 말겠다는 오기 같은 것이 나를 지켰다. 정신없이 봄、여름、가을、겨울을 보냈다.

두 딸도 학교를 잘 다니고, 공부도 잘했다. 나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상도 많이 받아왔다. 전교회장할 정도로 자랑스럽고 반듯하게 커가고 있었다. 시부모님은 점점 병세가 악화되어 입、퇴원 반복하니 아무리 열심히 일해 보아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아 나와 남편도 점점 지쳐가고 있렀다.

한방에 시부모님은 두 분 나란히 누워 대소변도 가리지 못해 나의 손길만 기다리고 있었다. 대소변을 치우고, 목욕시키고, 빨래하고 밥하고 청소하면서 난 어느덧 기계가 되어 쳇바퀴 돌 듯 하루하루 보내야만 했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이 어두운 긴 터널을 언제 햇빛을 볼 수 있을까 두렵고 무서웠다.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밖에만 돌고 있는 남편에게 기대할 수도 없었다.

움직이지 못한 시부모님과 초등학생 두 딸이 애틋하게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비하신 부처님과 인자하신 하나님은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을 주신지죽고 싶고 도망가고 싶었다. 섬진강에 뛰어들어 죽으려고 하는 순간에 어디서 “엄마” 부르는 소리를 들렸다. 순간에 중국에 있는 딸들을 생각나고 친정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랐다. 나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다. 아직 갚아야 할 부모님의 은혜와 낳고 기른 자식들에게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섬진강을 바라보며 실컷 울고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정신없이 몇 년을 보내고 있었을 때 동네사람들의 추천으로 하동군 효부상을 받게 되었다. 밤하늘 별똥별을 같은 행운이 찾아온 것으로 착각하고 시부모님을 더욱 정성껏 모셨다.

미운정도 고운정도 정인가 본다. 풍을 앓은 시아버님과 치매를 앓은 시어머님의 욕도 세월을 흘러 정겹게 들린다. 당신의 마지막 길에 수발해 주는 며느리가 있어서 고맙다는 말씀은 나를 울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모셔야 하고 미워하면서 대해준 지난날을 생각하면 한 없이 미안하고, 없는 시기에 잘 해드리지 못한 이 죄스러운 가슴은 지금도 아프고 아리다.

사춘기 지나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큰딸이 벌써 복지사가 되어 당당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둘째 딸도 건호대학을 졸업하고 부산대병원에 취직 되어 예비 백의천사의 희망 꽃을 피우고 있다. 어려운 처지에 학원에 한 번도 보내주지 못해 스스로 노력한 결과라 더욱 자랑하고 싶다. 계모 밑에서 아파야 할 사춘기도 내색하지 못하고, 사랑을 받아야 할 어린 나이에 벌써 인내를 배워서 힘들 때 나를 위로해 주는 사랑스러운 나의 딸로 되어 있다. 가슴으로 낳아 사랑으로 키워주지 못해서 늘 미안하고 죄스럽다. “나도 철없는 나이에 너희들을 만나 사랑해줄 법을 몰랐다. 나에게 관심 받고 싶어서 배 아픈 척했을 때 애처로운 눈을 못 본 척하고 학교에 보낸 독한 계모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친구들과의 불화로 마음고생을 하는 너를 보면서도 외국인 새엄마의 낙인을 찍힐 가봐 선뜻 나서지 못했다.”“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조신하게 다니라. TV보지 말고 공부해라. 폰 만질 시간 있으면 자격증이라고 하나 취득해라”라는 잔소리를 수시로 쪼아내는 계모가 진저리가 날 법한데 그래도 좋다고 비벼서 내 가슴으로 파고 들어온다. 딸들의 책상을 청소하면서 나온 친엄마의 사진을 우연히 봤을 때 배신의 화살을 내 신장을 관통했다. 몇 달 동안 끙끙 앓아 냉전을 선포한 적도 있었다. 나의 질투심은 천륜을 끊을 수 없는 하늘의 이치를 인정하고 친엄마를 찾아보라고 권했을 때 내심 만나지 않길 바라지만 나의 이기적인 생각을 꾹꾹 눌렀다. “잘 키워줘서 고맙다”라는 인사를 들려와 힘을 얻어 오늘도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빨래를 널고 설거지를 해라” 시켜놓고 딸이 추석에 사준 예쁜 옷을 입고 출근한다.

긴 방황 끝에 돌아온 남편과 외가에 있는 셋째와 넷째 딸을 데리고 와서 여섯 식구가 시끌벅적 좌충우돌하게 살고 있는 2012년 남편은 위암3기 판정을 받았다. 경황없이 닥친 위기에 생각조차 멈춰버렸다.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은 미워하면서 함께 하는 지난 십 몇 년 세월에 당신도 많아 아플 것을 생각치도 못했다. 당신의 부모와 당신의 아이들이 홀대 받을까봐 전전긍긍한 것이 병이 되는 가보다. 딸들과 상의 끝에 수술을 결정했다. 불행인지 행운인지 무사히 수술이 끝나 지금 정기적으로 병원에 오가면서 지내고 있다.

나도 역시 몇 년 전부터 하동군청에 취직을 되어 당당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누구의 아내와 누구의 엄마보다 ‘유효연’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싶었다. 포기하고 싶고 힘들었던 지난날에 나에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공부였다. ‘동력 없으면 경제력도 없다'는 생각에 운전면허증을 취득했고, 가족 건강을 위해 한식조리기능사도 취득했다. 딸들에게 모범을 되어야 하는 마음에 방송통신대를 입학하여 4년 만에 졸업하고 나니 자신감을 생겨 워드프로세서、한자、hsk、한국어능력시험 최고급도 취득했다. 내가 많이 알아야 딸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계모의 심보일지도 모른다. 다문화 선배로서 후배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사회복지사를 취득해 봉사하고 있다. 외국인도 한국인도 아니 세계인으로 더 큰 무대에서 나의 꿈을 펼치고 싶다.

술 때문에 남편과의 갈등을 이기지 못해 많이 싸우기도 했었다. 외동아들과 외동딸의 만남은 불행의 연속이지만 행운도 멀리 있지 않은 것 같은 생각 든다. 시부모님의 수발을 통해 나로 하여금 성숙해 지고, 딸들을 키우면서 부모의 책임을 학습하고 ,남편과의 갈등 통해 반성하게 되고, 벽랑 끝에 선 나는 날개가 있다는 것을 떨어지는 순간에 알게 되었다. 인생 숙제는 정답이 없는 것 같다. 어려워서 포기하고 싶은 숙제는 나에게 삶의 끈을 놓치지 않게 만들고, 불행의 밭에서 희망의 씨앗을 파종하고 정성을 들려서 사랑의 물을 주면 해운의 열매를 맺을 것은 굳게 믿게 되었다. 우리 여섯 식구가 로또 당첨번호처럼 인생의 대박을 터뜨릴 것을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함께 하여야 터뜨릴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하고 있다.

대한민국 전설의 계모사(繼母史)는 자식사랑에서 오는 오류라고 생각하다.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계모는 사랑 계산법을 잘 못한 것이다. 1+1=2,1-1=0,1×1=1, 1÷1=1 아니 3이 되고 6도 되는 것을 미처 몰랐을 것이다.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쓰는 계모사는 어떤 방정식도 어떤 정의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오늘도 나만의 방식, 나만의 스타일, 나만의 생각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보다. 더하기、빼기、곱하기、나누기 하면서 남는 인생장사를 하고 싶다.

코스모스 꽃비를 휘날리는 하동에 우리 가족은 나의 유일한 명품이자 소중한 재산이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드리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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